2006년-부시 ‘악의 축’ 발언·유엔 제재 뒤 1차, 2009년-은하 2호 장거리 로켓 발사 50일 뒤 2차, 2013년-풍계리서 장비 철수 ‘기만 전술’ 뒤 3차
북한의 핵개발은 19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며 시작돼 국제사회와 한국 정부의 갖가지 대응에도 불구하고 결국 6일 4차 실험에 이르렀다.2003년 노무현 정부와 미국 부시 행정부는 중국과 일본, 러시아까지 머리를 맞대는 ‘6자회담 카드’를 꺼냈고 2005년 베이징 6자회담에서 ‘9·19 공동성명’으로 북한의 모든 핵무기 포기 합의를 이끌어 냈다. 하지만 2006년 3월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 등으로 북·미 관계는 더욱 경색됐고 북한은 그해 7월 미국 독립기념일에 대포동 2호 미사일을 쐈다. 그리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 결의 채택에 항의하며 같은 해 10월 9일 1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2007년 10월 2차 남북 정상회담 성사로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는 진전을 이뤘고 북한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가능성이 보이기도 했다. 2008년 북한은 영변의 원자로 냉각탑 폭파를 CNN 등 해외 언론을 통해 직접 중계하는 언론 플레이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바마 행정부가 집권한 2009년 5월 북한이 2차 핵실험을 실시하며 이명박 정부에서의 남북 관계는 더욱 요동쳤다. 1차 때와 마찬가지로 북한은 핵실험 50일 전인 그해 4월 5일 장거리 로켓 ‘은하 2호’를 쏘며 2차 실험을 예고하기도 했다.
3차 핵실험은 박근혜 정부 출범 직전인 2013년 2월 12일 이뤄졌다. 은하 3호 로켓을 발사한 2012년 12월 12일 이후 2개월 만이었다. 북한은 비핵화 포기 선언을 하고 핵실험 갱도 내부 사진이 국방부에 의해 공개돼 3차 핵실험이 임박했음을 암시했다. 당시 북한은 핵실험을 실시한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주변의 인력과 장비를 철수하는 등 기만전술을 벌이다 3차 실험을 전격 실시하며 한반도 정세를 요동치게 했다.
1~3차 핵실험은 장거리로켓을 발사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채택에 반발하는 수순을 밟으며 이뤄졌지만 이번 4차 핵실험은 잠수함탄도미사일(SLBM)을 발사한 뒤 전격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였다. 또 북한 외무성의 핵실험 예고 발표 등 징후도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2016-01-07 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