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가 더 유창한 노무라는 일장기…매킬로이는 아일랜드 대표

한국어가 더 유창한 노무라는 일장기…매킬로이는 아일랜드 대표

입력 2016-04-27 10:02
수정 2016-04-27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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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스윙잉 스커츠 클래식에서 우승한 노무라 하루(24)는 알려졌듯이 한국계 일본인이다.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난 노무라는 초, 중, 고등학교를 모두 한국에서 다녔다. 문민경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자랐다. 일본어보다 한국어가 더 유창한 까닭이다. 골프를 하기 전에는 한국의 ‘국기’(國技) 태권도를 했다.

노무라는 ‘경계인’(境界人)이다.

경계인의 사전적 정의는 소속됐던 집단을 떠나 다른 집단으로 옮겼을 때, 원래 집단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을 금방 버릴 수 없고, 새로운 집단에도 충분히 적응되지 않아서 어정쩡한 상태에 놓인 사람이다. 노무라는 이 사전적 정의에 딱 맞는 ‘경계인’이다.

가치관이 형성되고 언어를 비롯한 생활 습관이 자리를 잡는 아동·청소년기를 보낸 한국이 노무라의 원래 소속 집단이라면 성인이 되어서 옮겨간 일본은 적응하기 어려운 새로운 집단이다.

노무라는 작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한화금융 클래식에서 우승한 뒤 공식 인터뷰에서 “한국에 있으면 한국 사람도 아니고, 일본 가면 또 일본 사람도 아니고…”라고 말한 바 있다. ‘경계인’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은 복수 국적을 허용하지 않는다. 노무라처럼 한국과 다른 나라 국적을 다 취득할 수 있는 여자는 만 22세 때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노무라는 22세 때 일본 국적을 선택했다. 아무래도 일본이 프로 무대 규모가 더 크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노무라는 오는 8월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일본 대표 선수로 참가할 게 거의 확실하다. 일본어보다 한국어를 더 유창한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에 출전하는 상황이 벌어질 판이다.

일본골프협회나 일본올림픽위원회 입장은 알려진 게 없다. 한국어보다 일본어가 더 익숙한 선수가 태극 마크를 달고 올림픽에 출전한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 상상해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지금은 세계랭킹 3위지만 작년까지 세계랭킹 1위였고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남자부에서 강력한 금메달 후보로 꼽는 로리 매킬로이는 아일랜드 대표 선수로 출전할 예정이다.

매킬로이의 국적은 영국이다. 그는 영국의 정식 국명인 ‘그레이트 브리튼과 북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의 수장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신민이다.

하지만 그의 정체성은 ‘아이리시’(Irish)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아일랜드골프협회 소속으로 뛰었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그는 아일랜드 대표 선수로 국제 대회에 출전했다.

북아일랜드는 가톨릭 국가 아일랜드가 영국에서 독립할 때 영국에 잔류한 곳이다. 가톨릭교도보다 영국 국교인 성공회 신자가 더 많은 지역이다. 아일랜드 섬 전체에서는 가톨릭교도가 절대다수지만 북아일랜드에서는 가톨릭이 소수다. 매킬로이 부모는 가톨릭이다.

그는 정치적, 종교적 이유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아일랜드 대표 선수였기 때문에 올림픽도 아일랜드 대표로 나가는 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매킬로이의 선택에 영국 국민과 아일랜드 국민의 반응은 따로 언급할만한 게 없다.

브라질 대표로 유력한 미리암 나글(35)은 8살 때 독일로 생활 터전을 옮긴 부모를 따라 브라질을 떠났다. 그는 독일에서 아동, 청소년기를 보냈다. 고등학교는 미국에서 다녔고 대학도 미국에서 마쳤다.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활동하는 등 골프 선수 경력도 대부분 미국에서 쌓았다.

독일에서 만난 독일인 남편과 가정을 꾸린 나글은 인생 대부분을 독일인으로 살았다.

그는 그러나 지난해 브라질골프협회의 권유를 받고 먼지 쌓인 브라질 국적을 되찾았다. 나글이 브라질 국민 대다수가 일상어로 쓰는 포르투갈 어를 구사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나글의 선택에 브라질이나 독일에서 어떤 언급을 했는지 역시 특별히 적을 게 없다.

지난 1999년 제1회 한일 여자프로골프 대항전 한국 대표팀에는 미국 국적 펄 신(49)이 포함됐다. 9살 때까지 신지영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살던 그는 부모와 함께 미국에 이민을 가서는 14살 때 미국 국적자가 됐다.

일본과 대항전을 앞두고 너무나 현격한 전력 차이 탓에 일방적인 패배가 걱정된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는 일본 쪽 양해를 구해 펄 신을 대표로 뽑았다.

펄 신은 아마추어 시절 미국-영국 골프 대항전 커티스컵에 미국 대표로 출전한 바 있었다. 펄 신은 이듬해 열린 2회 대회 때도 태극 마크를 달고 출전했다. 펄 신은 ‘고국’에 대한 헌신으로 상당한 찬사를 받았다. 한국 기업의 후원도 줄을 이었다.

2004년 제5회 한일 여자프로골프 대항전에도 미국 국적 교포 크리스티나 김(32)이 한국 대표 선수로 출전했다. 김초롱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출전한 크리스티나 김은 펄 신과 달리 팬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한국프로골프협회에는 “외국인에게 태극 마크를 달아줬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크리스티나 김은 이후 한국과 인연을 끊고 산다.

노무라뿐 아니라 미셸 위(미국·한국 이름 위성미), 리디아 고(뉴질랜드·한국 이름 고보경), 이민지(호주), 대니 리(뉴질랜드·한국 이름 이진명), 케빈 나(미국·한국 이름 나상욱)도 엄밀하게 말하면 ‘외국인’이다.

한국 골프가 만약 지금 같은 수준에 올라오지 못해 리우 올림픽에 파견할 마땅한 선수가 없는 상황을 상상해봤다. 그래서 대한골프협회가 대리 리나 케빈 나, 리디아 고, 미셸 위, 노무라 등에게 부탁해 그들이 태극 마크를 달고 리우 올림픽에 나선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태극기와 일장기를 나란히 새겨 넣은 노무라의 캐디백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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