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힐러리 목소리 높혀, 미 의회는 꿈쩍 안해
2011년 1월 애리조나 주 투산 정치행사 총기난사(6명 사망), 2012년 7월 콜로라도 주 오로라 극장 총기난사(12명 사망), 2012년 12월 코네티컷 주 샌디훅 초등학교 총기난사(26명 사망), 2013년 9월 워싱턴D.C. 네이비야드 총기난사(13명 사망), 2015년 6월17일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찰스턴 흑인교회 총기난사(9명 사망).미국 내에서 어이없는 총기난사 사건이 줄을 잇고 있지만 ‘워싱턴 정치권’은 좀처럼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행정부 수반인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17일(이하 현지시간) 찰스턴 교회 총기난사 사건 이후 연일 총기규제 입법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정작 입법권을 쥔 의회는 거의 미동도 하지 않는 분위기다.
20일 미국 의회 의사록을 들여다보면 민주당 소속 세일라 잭슨 리(텍사스)·루이스 슬러터(뉴욕) 의원 등이 이번 사건의 희생자들에게 애도를 표하는 성명을 내놓으면서 거듭되는 ‘총기폭력’에 우려를 표했지만, 정작 총기규제 입법을 거론한 의원은 아직 없는 실정이다.
정치권의 ‘무반응’은 공화당 진영에서 두드러진다. 당 지도부는 말할 것도 없고 여론의 흐름에 민감한 대선 주자들조차 언급을 회피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크리스 크리스티 뉴저지 주지사는 19일 기독교 모임에 참석해 “법으로 해결할 수 없다”며 “오로지 선의와 사랑만이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성 잠룡인 칼리 피오리나 전 HP CEO는 “즉각적인 정책적 처방에 나서거나 정치적 비방전을 벌여서는 안 된다”며 논의를 비켜나갔다.
유일한 흑인 대선주자인 벤 카슨은 총기규제 대신 인종문제를 부각시키며 논점을 피했다. 이밖에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나 랜드 폴(켄터키), 테드 크루즈(텍사스), 마르코 루비오(플로리다) 상원의원 등도 말을 아끼고 있다.
’복도 건너편’으로 가면 분위기가 다소 다르다. 민주당의 유력 대선 주자인 힐러리 클린턴 전 장관은 19일 네바다 주 라스베이거스 유세에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는가”라며 “우리는 인종, 폭력, 총기, 분열이라는 힘겨운 진실과 마주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러나, 총기규제 입법에 대한 정치적 의지와 적극성이 떨어지기는 민주당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이번 사건을 “테러행위”라고 비난하면서도 총기규제는 거론하지 않았다.
AP통신은 “클린턴의 발언에도 많은 민주당원은 총기규제 문제를 실패한 이슈로 보고 있다”며 “이 문제를 건드리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당연히 총기규제 공론화를 촉구하는 오바마 대통령의 발언에 제대로 힘이 실리지 않고 있다. 도리어 총기난사 사건이 터지면 대통령이 총기규제 입법을 촉구하고 의회는 이를 외면하며 여론이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새로운 일상’(a new normal)이 되고 있다는 자조 섞인 얘기만이 나온다. 오바마 측근들 사이에서도 총기규제 입법을 임기 중 업적으로 만들어보겠다는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는다.
총기난사 사건과 그에 따른 규제문제를 놓고 전개되는 이 같은 기현상은 미국 정치 특유의 구조에 기인하고 있다.
사실상의 ‘금권선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철저히 자금 후원에 의존하는 미국 정치인들로서는 선거판에 막대한 돈을 뿌려대는 미국총기협회(NRA)의 로비력 앞에 약자일 수 밖에 없는 탓이다.
특히 2013년 9월 NRA는 총기 거래자 신원 조회와 대용량 탄창 거래 금지 등을 추진했던 콜로라도 주 상원의원 2명을 상대로 소환투표를 추진해 의원직 박탈 결정을 끌어내는 ‘실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해 6월 “의회 구성원 대다수가 NRA를 두려워하고 있다”고 개탄하기도 했다.
NRA의 앤드루 아룰라난덤 대변인은 이번 사건에 대해 “모든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 논평을 내지 않겠다”면서도 “총기규제를 하려는 건 나쁜 정치(bad politics)”라고 말했다.
여기에 NRA가 전통적으로 지지해온 공화당이 현재 상·하원을 동시 장악한 입법구조에서는 총기규제 논의가 제대로 공론화되기 어렵다.
민주당도 이런 분위기를 의식해 총기규제 입법에 드라이브를 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사실 오바마 행정부 들어 총기규제 입법이 현실화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있었다. 2012년 12월 코네티컷 주 뉴타운 샌디훅 초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으로 아동 20명 등이 목숨을 잃는 참변이 나자, 총기규제를 강화하는 쪽으로 여론이 크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특히 상원은 총기 거래자에 대한 예외 없는 신원ㆍ전과 조회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법안을 초당파적으로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법안은 2013년 4월 본회의에서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 진행 방해)를 피하는 데 필요한 60표조차 얻지 못하면서 사그라졌다.
크리스 머피(민주·코네티컷) 상원의원은 “이번 사건으로 (총기규제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을 바꿀 수 있을지가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현재 의회에는 총기규제 법안이 다시 발의돼 있지만, 이렇다 할 탄력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3월 마이크 톰슨(민주·캘리포니아), 로버트 돌드(공화·일리노이) 하원의원은 총기 구매자의 신원조사를 대폭 강화하도록 하는 총기규제 강화법안을 재발의했으나 심의가 진척되지 못하고 있다.
이번 사건이 미국 사회에 드리운 충격파가 워낙 크기는 하지만, 이번에도 총기규제 입법이 의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변죽만 울리다 그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미국진보센터의 찰스 파슨 연구원은 “이번 사건이 의회가 총기규제 입법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전환점이 되기를 바란다”며 “그러나 나는 순진하지 않다”고 말해, 현실의 벽을 인정했다.
대니얼 웹스터 존스홉킨스대 총기정책센터 소장은 “일반 대중들이 총기안전 대책을 희망하고 있지만, 가까운 미래에 연방에서 관련 법이 통과될 것으로 보지 않는다”며 “NRA의 로비에 굴복한 일부 의원들의 저항이 매우 심하다”고 말했다.
미국 정치권이 움직이지 않는 데에는 미국 내 여론이 ‘확실히’ 총기규제 쪽에 흐르지 않고 있는 점도 있다.
갤럽이 1월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총기규제를 보다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고작 31%에 그쳤다. 지난 4월 로이터 여론조사에서 미국인 48%는 총기 규제를 지지하고, 41%는 규제가 필요 없다고 답했다.
다만, 미국 전역에 걸쳐 주 의회 단위에서 총기규제 입법이 속속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연방의회도 서서히 압박감을 느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시민단체인 ‘총기폭력예방법센터’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공화당 성향으로 분류되는 앨라배마, 네바다, 사우스 캐롤라이나, 버몬트, 워싱턴, 루이지애나, 오리건 주 의회가 총기규제 관련법을 제정했거나 추진 중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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