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 고고학자, IS 위협에도 팔미라 유물 행방 감추다 참수 당해
시리아 고대유적도시 팔미라에서 태어나 팔미라 연구에 반세기를 바친 노(老)학자가 자신이 그토록 아끼던 팔미라를 지켜내려다 결국 그곳에서 최후를 맞았다.19일(현지시간) 수니파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의 위협에도 팔미라 유물의 행방을 함구하다 IS 손에 잔인하게 참수된 것으로 알려진 고고학자 칼리드 알아사드(83)는 ‘미스터 팔미라’라는 별명처럼 고대유적 팔미라와 평생을 함께 한 학자였다.
팔미라에서 태어난 그는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역사와 교육학 학위를 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팔미라에서 보냈다.
유네스코가 세계유산으로 지정한 아름다운 고대유적 팔미라는 아사드에게 단순한 연구 대상 이상이었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아사드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단순한 연구자이기보다는 자신이 태어난 곳의 역사에 대한 열정을 바탕으로 독학을 통해 성과를 이룬 학자라고 말한다.
’팔미라의 클레오파트라’로 불리는 팔미라의 대표적 역사 속 인물인 3세기 제노비아 여왕의 이름을 그의 딸에게 붙인 것만 봐도 팔미라에 대한 그의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아사드는 1963년 팔미라 유적 담당자로 임명된 이후 2003년 은퇴할 때까지 40년간 팔미라를 책임졌다. 팔미라와 관련한 여러 편의 논문과 저서를 발표했고, 발굴과 복원 작업도 주도했다.
아사드를 잘 알고 지낸 아므르 알아즘 미국 쇼니주립대 교수는 영국 일간 가디언에 “칼리드 알아사드를 언급하지 않고 팔미라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그는 팔미라의 모든 구석구석을 다 알았고, 이러한 종류의 지식은 대체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했다.
고인의 오랜 친구인 영국박물관의 조너선 터브도 “팔미라에 대한 그의 열정은 절대로 사그라지지 않았다”며 “팔미라를 방문할 때마다 그는 서류뭉치로 가득한 자신의 작은 사무실로 나를 데리고 가 최근 연구 결과물들을 쏟아냈다”고 회고했다.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세력을 넓혀가던 IS가 지난 5월 마침내 팔미라 코앞까지 진격했을 때도 아사드는 팔미라를 떠나길 거부했다.
박물관에 있던 팔미라의 귀중한 유물들을 IS가 빼돌리지 못하도록 당국을 도와 안전한 곳으로 숨긴 후 자신은 남아 팔미라를 지켰다.
시리아 홈스에 사는 아사드의 아들 모함메드는 NYT와의 전화통화에서 “아버지는 IS가 자신처럼 나이든 사람은 괴롭히지 않을 것이라며 팔미라를 떠나기를 거부하셨다”며 “너무 순수하셔서 IS가 자신을 해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안하셨다”고 전했다.
그의 예상과 달리 IS는 팔미라에 진입하자마자 아사드를 찾아와 며칠간 구금했다. 당시에는 무사히 풀려났다가 몇 달 후 다시 한번 체포돼 처형되기까지 한 달 넘겨 붙잡혀 심문을 받았다.
오랜 심문에도 팔미라 유물의 행방을 대지 않은 아사드는 팔미라 박물관 밖 광장에서 수십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참수된 후 유적지로 옮겨져 두 동강난 시신으로 로마시대 기둥에 내걸렸다.
IS 지지자들이 인터넷에 올린 사진에 따르면 시신의 허리에 걸린 흰 플래카드에는 아사드가 배교자이며 우상숭배 책임자였다는 것을 비롯한 그의 ‘죄목’이 붉은 글씨로 적혀있었다.
아즘 교수는 “아사드는 팔미라에서 평생을 살고, 팔미라에서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불행히도 실제로 그렇게 됐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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