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위기로 유로존 균열, 중·일 국가주의 노골화
세계 곳곳에서 국가주의·민족주의로 불리는 ‘내셔널리즘’(nationalism)이 심해지고 있다.그리스 위기는 통합의 상징인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의 균열 조짐을 보여줬다. 강성대국을 꿈꾸는 중국과 일본의 국가주의는 노골적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다.
허핑턴 포스트는 세계화가 내셔널리즘의 불씨를 끄기는커녕 오히려 오히려 활활 타오르게 했다고 분석한다.
’하나의 세계’나 ‘유럽의 통일’은 이상일 뿐이고 전 세계적인 자본 흐름은 다국적 기업을 더 탐욕스럽게 만들고, 부유하지 못한 국가에서의 복지나 연금 지출은 ‘긴축’을 불러오면서 ‘국가주의’의 원인이 됐다는 것이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가 저성장의 덫에 빠지자 시장논리보다 자국이익을 추구하는 움직임은 더욱 강해졌다.
양적완화에 따른 환율 전쟁은 물론 기업 간 경제논리가 주로 작용하는 인수합병(M&A)에도 자국 이익 침해는 눈뜨고 보지 못한다는 기조가 더욱 심해지고 있다.
◇ 그리스 위기, 유럽 분열 시발점…중일 국가주의 노골화
지난 5일 그리스에서 실시된 국민투표의 최대 승자는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증)’와 내셔널리즘이라고 영국 일간 가디언은 분석했다.
그리스 사태를 계기로 유로존은 ‘하나의 유럽’을 원하는 프랑스 중심의 남유럽 국가와 유로존에 속할 자격이 없는 국가는 탈퇴시켜야 한다는 독일 중심의 북유럽 국가가 대결하는 민낯을 그대로 드러냈다.
또 그리스가 유로존이 요구하는 협상안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이며 ‘백기투항’하면서 이를 관철한 독일을 잔인하다고 비판하는 움직임은 다소 과격하게 이어지고 있다.
트위터에서는 ‘보이콧독일(Boycottgermany)’이라는 해시태그(#)가 확산하며 독일 제품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있고, 메르켈 독일 총리보다 더한 강경노선을 보인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은 칼을 든 이슬람국가(IS) 전사로 풍자되고 있다.
이탈리아와 포르투갈, 스페인도 비슷한 재정위기를 겪으면서 긴축을 강요당해 재정위기와 이에 따른 국가주의는 그리스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많다.
아시아 국가들은 정치·경제력을 키워가는 중국의 내셔널리즘에 긴장하고 있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문가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석좌교수는 프로젝트 신디케이트 기고에서 중국이 문화 및 경제적인 힘을 강조하면서 ‘소프트 파워’를 키우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중국이 내셔널리즘을 부채질하고 공산당에 대한 통제권을 강력하게 쥐는 한 소프트파워는 언제나 제한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남중국해(South China Sea)를 둘러싼 영유권 분쟁으로 이미 중국과 베트남, 필리핀 사이의 갈등의 수위가 높아지고 있고, 중국의 도발을 두고 볼 수 없는 미국을 긴장시키고 있다.
여기에다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은 위헌 논란에 휩싸인 집단 자위권 법안을 중의원(하원)에서 강행 처리해 중국과의 관계에 빨간 불이 켜졌다.
베이징대학의 왕신셩 교수는 “법안의 통과로 중국과 일본 모두에서 내셔널리즘이 더 힘을 얻게 될 것”이라면서 “새로운 법안으로 주변국들 사이에서 전쟁 때 일본의 침략에 대한 기억이 살아날 것이고 아시아 지역에서 군비경쟁이 촉발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중부유럽과 동유럽 지역에서는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둘러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분쟁으로 내셔널리즘과 반(反)러시아 움직임이 가시화하고 있다.
런던정경대의 크리스티앙 니토우 연구원은 지난 8일 기고를 통해 중부유럽과 EU 소속의 동유럽 국가의 지도자들에게 내셔널리즘을 이용하는 것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우크라이나 위기는 이들 국가에서 ‘내셔널리즘 수사학’의 수문을 다시 열어젖혔다고 분석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도발은 동유럽 지역이 안전하거나 분쟁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틀렸음을 보여줬다고 지적하면서 이것이 내셔널리즘이 살아나는 계기라고 지적했다.
브루킹스 연구소의 샤피로 연구원도 “국가는 궁극적으로 ‘외부’의 영향력에 대해 자국의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며 전 세계가 더 위협적으로 바뀔수록 더 많은 이들이 국가적 정체성을 고수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했다.
◇ 끝나지 않은 환율 전쟁…경제 논리 넘어선 M&A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경제를 살리기 위한 각국의 노력은 환율 전쟁으로 번졌다.
세계 각국은 내수 부양과 수출 확대를 위해 양적완화에 나서면서 자국 통화의 약세를 유지하고자 힘썼다.
세계 시장에서 상대국의 수출을 갉아먹고 자국의 경기를 부양한다는 면에서 통화 약세 추구는 피 말리는 전쟁을 방불케 한다.
환율 전쟁은 올해 들어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올해 기준금리는 내리거나 국채 매입 등의 양적완화를 실시한 나라는 한국을 포함해 30여곳에 이른다.
환율을 무기로 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나라별 명암도 엇갈렸다.
지금까지는 일본과 유로존이 환율 전쟁에서 승자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분석이 많다. 반면, 한국은 특히 엔화 약세의 부정적 영향을 고스란히 받고 있다.
환율이 수출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만큼 각국의 날카로운 신경전도 펼쳐졌다.
올해 5월 유로화 강세 조짐이 나타나자 국채를 앞당겨 추가 매입할 것이라는 유럽중앙은행(ECB) 한 이사의 발언은 ‘구두 개입’이라는 뒷말을 낳았다.
지난달에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참석차 독일을 찾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달러화 강세 발언의 진위를 놓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기업과 기업 간 문제인 인수합병(M&A)에서도 경제 논리를 넘어 정치·사회적인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 세계 패권국가인 미국의 아성에 중국이 강력한 도전자로 등장하면서 M&A 영역에서 양측의 신경전도 더욱 심해졌다.
최근 중국의 칭화유니그룹(紫光集團·쯔광그룹)이 미국의 마이크론 테크놀로지 인수에 나서면서 불거진 논란이 대표적이다.
반도체 산업의 발전을 노린 시진핑(習近平) 지도부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라는 분석에 미국 의회의 인수 승인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시장에선 흘러나왔다. 미국 의회는 그동안 군사, 에너지 등 안보에 관련되는 안건에 반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M&A와 관련해 국가의 이익을 중시하는 움직임은 최근 한국에서도 감지됐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은 합병비율이 불공정하다며 반대한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공격’으로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결국 임시 주주총회에서 삼성 측의 완승으로 막을 내렸지만 양측의 공방 과정에서 ‘국민기업’과 ‘외국계 자본’의 대결이라는 점은 공공연히 부각됐다.
블룸버그통신은 삼성의 완승을 ‘애국심’의 승리로 평가하기도 했다.
블룸버그는 주총을 하루 앞둔 지난 16일 삼성 측의 승리 가능성이 크다는 분위기가 퍼지자 “(아르헨티나 정부를 디폴트에 빠트린) 엘리엇의 폴 싱어 회장은 한국 투자자들이 애국심이 얼마나 투철한지를 과소평가했다는 점을 곧 알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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